다테 무네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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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다테 무네나리는 에도 시대 후기의 다이묘로, 우와지마 번의 7대 번주였다. 그는 1844년 번주가 되어, 양부의 개혁을 이어받아 식산흥업을 추진하고 인재를 등용하여 군제 근대화에 힘썼다. '막말의 사현후' 중 한 명으로 꼽히며, 막부 정치에 참여하여 공무합체론을 주장했으나, 안세이 대옥으로 은퇴했다. 이후 메이지 유신 시대에 신정부의 요직을 맡았으며, 청나라와 조약을 체결하고, 철도 부설을 위해 차관을 도입하는 등 근대화에 기여했다. 말년에는 백작 작위를 받았으며, 1892년에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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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테 마사무네의 서자이자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양자였던 다테 히데무네는 오사카 전투 공으로 이요 우와지마 초대 번주가 되었으며, 번정 개혁을 통해 우와지마 번의 경제적 성장과 사회적 안정에 기여했으나 권위주의적 통치에 대한 비판도 존재한다. - 우와지마번주 - 다테 무네타다
다테 무네타다는 다테 무라토시의 장남으로 우와지마 번의 7대 번주가 되어 번정 개혁과 특산품 육성을 통해 번의 발전에 기여했으며, 98세까지 장수하며 막부에 개국을 건의했다. - 막말 우와지마번 사람 - 오무라 마스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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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테 무네나리 - [인물]에 관한 문서 | |
|---|---|
| 기본 정보 | |
| 존칭 | 후작 |
| 이름 | 다테 무네나리 |
| 로마자 표기 | Date Munenari |
| 일본어 표기 | 伊達 宗城 |
| 출생일 | 1818년 9월 1일 |
| 출생지 | 에도, 일본 |
| 사망일 | 1892년 12월 20일 |
| 국적 | 일본 |
| 배우자 | 나베시마 나리나오의 딸, 마스코 |
| 관직 | |
| 직위 | 우와지마 번주 |
| 재임 시작 | 1844년 |
| 재임 종료 | 1858년 |
| 전임자 | 다테 무네타다 |
| 후임자 | 다테 무네에 |
| 가문 | |
| 성씨 | 야마구치 씨 → 다테 씨 |
| 아버지 | 야마구치 나오카쓰 |
| 어머니 | 마키타 히로토모의 딸 |
| 양아버지 | 다테 도시미쓰, 다테 무네노리 |
| 양어머니 | 나베시마 칸 |
| 형제 | 야마구치 나오노부, 다테 무네나리, 다테 무네타카 |
| 자녀 | 사나다 유키타미 다테 무네아쓰 초자 토시 오쿠다이라 마사유키 히로시 준 다키와키 노부히로 이쿠 마키노 다다요시 다테 무네노리 야스시 다테 무네요 마키타 히로시로 |
| 양자 | 다테 무네토쿠 |
| 칭호 및 직책 | |
| 관위 | 종4위 대선대부 도토미노카미 시종 종4위상 이요노카미 좌근위권소장 의정 민부경 겸 대장경 흠차전권대신 종1위 |
| 묘소 | |
| 묘소 위치 | 도쿄도다이토구의 야나카 영원 에히메현우와지마시의 도카쿠지 우와지마시의 남예호국신사 |
| 기타 정보 | |
| 특기 사항 | 막말의 사현후 중 한 명 |
2. 생애
1818년(문정 원년) 에도에서 하타모토[1] 야마구치 나오카쓰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마키다 히로토모의 딸이다. 어릴 적 이름은 가메사부로(亀三郎)였다. 1827년 4월, 참근교대로 우와지마번주 다테 무네노리의 임시 양자가 되었다. 1828년 10월, 다테 무라토키의 손자인 우와지마번 가신 다테 도시히데의 양자가 되었으나, 이듬해 1829년 4월 11일, 무네노리의 양자가 되었다. 무네노리의 다섯째 딸 사다(貞)와 약혼하여 사위 양자 형태를 취했으나, 사다는 요절하여 혼인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2. 1. 유년기 및 가문 계승
무네나리는 1818년 에도에서 하타모토[1] 야마구치 나오카쓰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릴 적 이름은 가메사부로(亀三郎)였다.[2] 무네나리의 아버지는 5대 우와지마번 번주 다테 무라토키의 아들이었고, 그 때문에 후계자가 없던 7대 우와지마 번주 다테 무네타다의 양자 후보가 되었다.[2]1827년 4월, 참근교대로 인해 우와지마에 온 무네나리는 다테 무네타다의 임시 양자가 되었다. 1828년 10월, 우와지마번 가신이자 다테 무라토키의 손자인 다테 도시히데의 양자가 되었으나, 이듬해 1829년 4월 11일, 정식으로 다테 무네타다의 양자가 되었다. 무네타다의 다섯째 딸인 사다(貞)와 약혼하여 사위 양자 형태를 취했으나, 사다는 요절하여 혼인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2. 2. 번정 시대
덴포 15년(1844년), 무네나리는 양부의 은퇴에 따라 우와지마번의 번주가 되었다. 무네나리는 양부의 식산흥업 중심 번정 개혁을 이어받아 목로(木蝋) 전매, 석탄 매장 조사 등을 실시하였다. 에도 막부로부터 쫓겨 에도에서 잠복하고 있던 고노 나가히데를 초빙하고, 조슈번에서 오무라 마스지로를 초빙하여 군제 근대화에도 착수하였다.후쿠이번주 마쓰다이라 하루아케, 도사번주 야마우치 요도, 사쓰마번주 시마즈 나리아키라와 교류하며 ‘막말의 사현후(幕末の四賢侯)’로 불렸다. 이들은 막부 정치에도 적극 간섭하여, 로주 수좌 아베 마사히로에게 막정 개혁을 요구하였다.
아베 마사히로 사후, 안세이 5년(1858년) 다이로에 취임한 이이 나오스케와 쇼군 계승 문제로 정면 대립하였다. 13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사다가 병약하여 후계자가 없었기 때문에, 무네나리를 포함한 사현후와 미토번주 도쿠가와 나리아키 등은 차기 쇼군으로 도쿠가와 요시노부를 추대하였다. 한편, 나오스케는 기슈번주 도쿠가와 이에모치를 추대하였다. 나오스케는 다이로의 권한을 발동하여 요시노부가 아닌 이에모치를 14대 쇼군으로 옹립하고, 요시노부를 지지하던 세력을 배제하였다. 이른바 안세이 대옥이다. 이로 인해 무네나리는 하루아케, 나리아키라 등과 함께 은거 징계를 받았다.[2]
무네나리는 양부인 다테 무네토쿠가 은퇴 후 얻은 친아들 무네토쿠를 양자로 삼아 번주 지위를 물려주었지만, 은퇴 후에도 번정에 계속 영향을 주었다. 징계 해제 후에는 다시 막부 정치에 관여, 분큐 2년(1862년)에는 사쓰마번이 일으킨 이쿠마이 사건의 배상금을 막부가 지불하는 것에 반대하였다. 한편으로, 이쿠마이 사건을 일으킨 당사자인 시마즈 히사미쓰와는 우호 관계를 유지하며, 공무합체를 추진하였다. 분큐 3년(1863년) 말에는 산요 회의, 게이오 3년(1867년)에는 사후 회의에 참가하여 국정에 참여하였지만, 모두 단기간에 끝났다.
게이오 2년(1866년), 영국 공사 해리 파크스가 프린세스 로열 호를 타고 우와지마를 방문하였을 때, 무네나리는 잠행으로 배를 방문하고, 파크스 일행 상륙 시에는 열병식에 이어 순일본식 연회로 접대하였다. 우와지마를 떠날 때에는 번의 깃발과 영국 국기를 교환하였으며, 훗날 어니스트 사토가 우와지마를 방문하였을 때에는 일본의 장래에 대해 천황을 중심으로 한 연방 국가가 되어야 한다는 의견을 교환하는 등, 외국인과도 적극 교류하였다.[5]
2. 3. 증기선 건조
무라타 구로쿠(村田蔵六)를 등용하여 네덜란드어 전문서를 번역하게 하고, 배를 설계하도록 명령했다. 한편, 일본식 배에 대포를 싣고 포격 실험을 시작했고, 흑선과 비슷한 외륜을 가진 인력으로 움직이는 일본식 배를 들여와 연구하게 했다.[5]핵심인 증기기관은 제등 장수 카즈쿠라(嘉蔵, 후일의 마에하라 코잔)를 발탁하여 제작을 명령했다. 번을 들여 시행착오 끝에 실험적인 증기선이 완성되었다. 흑선이 처음으로 일본에 나타난 지 불과 3년 후의 일이었다. 일반적으로는 외국인 기술자를 고용한 사쓰마 번의 배가 일본 최초의 증기선으로 여겨지지만, 우와지마 번의 배는 일본인들만으로 만든 증기선의 제1호였다.[5]
2. 4. 메이지 유신 이후
1868년 왕정복고 이후, 다테 무네나리는 신정부에서 의정(각료)을 맡았다. 그러나 보신 전쟁이 발발하자 도쿠가와 씨 가문에 대한 동정심으로 사쓰마와 조슈의 행동에 항의하며 사임했다.[2]1869년 민부경 겸 대장경이 되어 철도 부설을 위해 영국으로부터 차관을 얻는 등 재정 개혁에 참여했다. 1871년에는 흠차전권대신으로서 청나라의 전권대신 이홍장과 일청수호조규를 체결했다.[3] 이후 주로 외국 귀빈 접대 역할을 맡다가 그 해 중앙 정계에서 은퇴했다.
1881년에는 세계 일주 중 일본에 들른 하와이 왕국 국왕 칼라카우아를 접대하고 훈장을 받았다.[6]
1884년 화족령에 따라 백작 작위를 받았으며, 1891년에는 양자 다테 무네토쿠(伊達宗徳)가 무네나리의 유신 당시 공로로 후작으로 승작되었다.
1892년 고지마 이에타다의 사법관 농화 사건에서는 반(反) 고지마 파로부터 고지마의 옛 주군 입장으로서 사직을 권고하는 역할을 맡았으나, 실제로는 고지마를 만나지 않고 오히려 재직을 촉구하는 서신을 보냈다. 같은 해, 도쿄 이마도 저택에서 75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3. 평가
오쿠마 시게노부일본어는 다테 무네나리를 "매우 순수하다는 것만 빼면, 특별히 뛰어난 점은 없다"고 평가했다.[7] 무네나리는 일본의 근대화와 개혁을 추진했지만, 동시에 제국주의적 팽창의 길을 열었다는 비판도 받는다. 특히 1871년 리훙장과 체결한 일청수호조규는 조선에 대한 일본의 영향력을 확대하는 계기가 되었다.
4. 연보
- 문정 12년(1829년) 4월 11일, 세자가 된다.
- 문정 13년(1830년) 9월 3일, 병오로(兵五郎)로 개명한다.
- 덴포 5년(1834년) 12월 16일, 종사위하(従四位下)에 서임되고, 대선대부(大膳大夫)에 임관된다.
- 덴포 6년(1835년) 4월 19일, 원복한다.
- 덴포 15년(1844년) 7월 16일, 가독을 상속하여 번주가 된다.
- 덴포 15년(1844년) 12월 16일, 시종(侍従)으로 전임되고, 대선대부는 겸임한 채로 유지한다.
- 안세이 5년(1858년) 11월 23일, 은거한다.
- 안세이 5년(1858년) 11월 25일, 대선대부에서 이요노카미(伊予守)로 겸임을 변경한다.
- 겐지 원년(1864년) 4월 10일, 좌근위권소장(左近衛権少将)으로 전임된다. 이요노카미는 겸임한 채로 유지한다.
- 겐지 원년(1864년) 4월 18일, 종사위상(従四位上)으로 승서된다. 좌근위권소장·이요노카미는 겸임한 채로 유지한다.
- 게이오 3년(1867년) 12월 28일, 막부 정부의 의정에 취임한다.
- 게이오 4년(1868년) 1월 3일, 군사참모(군사총재는 가쇼 친왕(嘉彰親王))를 겸임한다.
- 게이오 4년(1868년) 1월 8일, 군사참모직을 그만둔다.
- 게이오 4년(1868년) 1월 12일, 외국걸(外国掛)을 겸임한다.
- 게이오 4년(1868년) 1월 17일, 직제 개정에 따라 외국걸을 개편하고, 외국사무걸(外国事務掛) 설치에 따라, 동 총독을 겸임한다.
- 게이오 4년(1868년) 1월 20일, 외국사무총독직을 그만둔다.
- 게이오 4년(1868년) 1월 22일, 오사카 진대(大坂鎮台)의 督을 겸임한다.
- 게이오 4년(1868년) 1월 27일, 직제 개정에 따라 오사카 진대를 폐지하고, 오사카 재판소(大坂裁判所) 설치에 따라, 동 부총독을 겸임한다.
- 게이오 4년(1868년) 2월 20일, 외국사무국 보(外国事務局輔)를 겸임한다.
- 게이오 4년(1868년) 3월 15일, 오사카 재판소 부총독직을 그만둔다.
- 게이오 4년(1868년) 윤4월 21일, 직제 개정에 따라 외국사무국을 폐지하고, 외국관(外国官) 설치에 따라 동 지사(知事)에 취임한다. 의정직은 그만둔다.
- 게이오 4년(1868년) 5월 10일, 종삼위(従三位)로 승서되고, 참의(参議)에 보임된다.
- 게이오 4년(1868년) 6월 4일, 임시로 의정이 된다. 외국관 지사는 겸임한 채로 유지한다.
- 메이지 원년(1868년) 10월 20일, 종이위(従二位)로 승서되고, 권중납언(権中納言)으로 전임된다. 의정에 취임하고, 외국관 지사는 겸임한 채로 유지한다.
- 메이지 2년(1869년) 5월 15일, 의정직을 그만둔다.
- 메이지 2년(1869년) 5월 29일, 외국관 지사직을 그만둔다.
- 메이지 2년(1869년) 7월 6일, 령각사(領各使)에 취임한다.
- 메이지 2년(1869년) 7월 14일, 사향간기후(麝香間祗候)로 예우받는다.
- 메이지 2년(1869년) 9월 12일, 민부경(民部卿)·대장경(大蔵卿)에 취임한다.
- 메이지 3년(1870년) 7월 10일, 민부경직을 그만둔다.
- 메이지 4년(1871년) 4월 27일, 흠차전권대신(欽差全権大臣)을 겸임하여 청국에 파견된다.
- 메이지 4년(1871년) 6월 27일, 대장경·흠차전권대신 등의 직을 그만두고, 사향간기후로 예우받는다.
- 메이지 9년(1876년) 5월 23일, 화족회관(華族会館) 제1부장에 취임한다.
- 메이지 9년(1876년) 12월 31일, 화족회관 제1부장직을 그만둔다.
- 메이지 12년(1879년) 8월 1일, 하치스카 시게나가(蜂須賀茂韶)·이와사키 야타로(岩崎弥太郎)와 함께 도쿄해상보험회사(東京海上保険会社) 설립에 관여한다.
- 메이지 12년(1879년) 10월 22일, 명궁 요시히토 친왕(明宮嘉仁親王)을 시중든다.
- 메이지 14년(1881년) 7월 16일, 훈이등 욱일중광장(勲二等旭日重光章)을 수상한다.
- 메이지 16년(1883년) 12월 26일, 수사관 부총재에 취임한다.
- 메이지 19년(1886년) 1월 9일, 수사관 폐지에 따라 사향간기후로 예우받는다.
- 메이지 22년(1889년) 11월 27일, 훈일등 수보장(勲一等瑞宝章)을 수상한다.
- 메이지 23년(1890년) 10월 21일, 훈일등 욱일대수장(勲一等旭日大綬章)을 수상한다.
- 메이지 25년(1892년) 12월 17일, 종일위(従一位)로 승서된다.
- 메이지 25년(1892년) 12월 20일, 훙거(薨去)한다.
- 다이쇼 2년(1913년), 같은 해에 창건한 우와지마(宇和島)에 있는 쓰루시마 신사(鶴島神社)(현재의 남요 호고쿠 신사(南予護国神社))의 신으로 모셔진다.
5. 가계
무네나리는 에도에서 하타모토(旗本) 야마구치 나오카쓰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1] 무네나리의 할아버지 야마구치 나오키요는 우와지마 5대 번주 다테 무라토키의 차남으로 야마구치 가의 양자가 되었다.[4] 어머니는 마키다 히로토모의 딸이다.
| 관계 | 이름 | 비고 |
|---|---|---|
| 아버지 | 야마구치 나오카쓰 | (1777년 ~ 1825년) |
| 어머니 | 마키다 히로토모의 딸 | |
| 양부 | 다테 도시미쓰 (다테 무라토키의 장남 도쿠테루의 아들)[12], 다테 무네노리 | (1792년? ~ 1889년) |
| 양모 | 관 | 나베시마 하루시게의 열번째 딸 |
| 정실 | 마스코 | 나베시마 나나오의 딸, 관의 조카, 전 남편은 아베 마사야스 |
| 측실 | 영신원(다케다씨) | |
| 장남 | 사나다 유키타미 | (1850년 ~ 1903년), 사나다 유키노리 양자 |
| 차남 | 다테 무네아쓰 | (1852년 ~ 1911년), 다테 요시쿠니 양자 |
| 차녀 | 첫째 딸 | 야나기하라 사키미쓰 정실 |
| 삼녀 | 민 | 마쓰네 시로오미(조다이 가로・마쓰네 도쇼의 장남) 부인, 하이진・마쓰네 도요키는 자녀 |
| 사녀 | 리 | |
| 육녀 | 희 | 쇼코. 난부 도시야스에게 시집갔으나 이혼, 미즈노 다다히로 계실·이혼, 미쓰이 다카히로 부인 |
| 칠녀 | 순 | 가신 구와오리 만로쿠 성방에 시집감. 성방의 차녀·야에는 이로카와 다케히로의 삼촌·이로카와 칸죠(야스다 신탁은행 간부) 부인[13] |
| 팔녀 | 정 | 요절 |
| 오남 | 다키와키 노부히로 | (1865년 ~ 1913년), 다누마 지에와 결혼 후 이혼, 다키와키 노부나리 양자 |
| 구녀 | 몇 | 시가 헤이시로(志賀平四郎)에게 시집갔으나 이혼, 구신 사쿠라다 에이지로(桜田栄次郎) 부인 |
| 육남 | 마키노 다다나가 | (1867년 ~ 1933년), 마키노 지요코(牧野千代子) 양자 |
| 측실 | 다가와(오오카씨) | |
| 사남 | 오쿠다이라 마사유키 | (1855년 ~ 1884년), 오쿠다이라 마사타케 양자 |
| 오녀 | 조 | 요절 |
| 남자 | 무마루 | |
| 측실 | 우메무라씨 | |
| 칠남 | 다테 무네미치 | (1872년 ~ 1892년), 분가·남작 |
| 팔남 | 호정 | 요절 |
| 십이녀 | 타이 | 사와 마사(佐和正) 양녀, 사카타 구로(阪田九郎) 부인 |
| 구남 | 다테 무네요 | (1880년 ~ 1922년), 다테 무네미치 양자 |
| 십남 | 마키타 히로시로 | (1881년 ~ 1943년), 마키타 히로타카 양자 |
| 십삼녀 | 코우 | |
| 십일남 | 젠쥬 | 요절 |
| 십사녀 | 소네코 | |
| 양자 | 다테 무네에 | (1830년 ~ 1906년), 다테 무네노리의 셋째 아들 |
6. 등장 작품
- 시마 료타로의 단편집 《취하여 사는 듯》에 수록된 소설 《이달의 흑선》
- 신카와 타케토시의 소설 《이달소성》
- 쿠스노키 세이이치로의 《열전·일본근대사―이달소성으로부터 기시 노부스케까지》
- 1977년 NHK 대하드라마 《화신》 (배우: 오오키 미노루)
- 1990년 NHK 대하드라마 《날갯짓처럼》 (배우: 키타무라 소이치로)
- 1998년 NHK 대하드라마 《도쿠가와 요시노부》 (배우: 다이몬 마사아키)
- 2008년 NHK 대하드라마 《아츠히메》 (배우: 모리타 준페이)
- 2018년 NHK 대하드라마 《사이고돈》 (배우: 하세가와 마사히코)
- 2021년 NHK 대하드라마 《푸른 하늘을 꿰뚫어》 (배우: 스가와라 다이키치)[14]
참조
[1]
서적
Date Munenari zaikyō nikki
Nihon shiseki kyōkai 日本史籍協会
1916
[2]
웹사이트
幕末維新新選組 伊達宗城
http://www.bakusin.c[...]
[3]
웹사이트
Archived copy
https://web.archive.[...]
2007-08-03
[4]
웹사이트
Genealogy
https://reichsarchiv[...]
2010-05-07
[5]
웹사이트
データベース『えひめの記憶』八 パークスの宇和島訪問
http://www.i-manabi.[...]
愛媛県生涯学習センター
2017-10-13
[6]
웹사이트
ハワイ国王カラカウア王から伊達宗城公への勲章、勲記について
http://www.pref.ehim[...]
2010-05-26
[7]
서적
早稲田清話
[8]
간행물
叙任及辞令
官報
1889-12-02
[9]
간행물
叙任及辞令
官報
1889-12-28
[10]
간행물
叙任及辞令
官報
1892-12-19
[11]
간행물
叙任及辞令
官報
1888-03-07
[12]
서적
家中由緒書 下
近代史文庫宇和島研究会
1980
[13]
서적
大衆人事録 第12版
https://dl.ndl.go.jp[...]
帝国秘密探偵社
1937
[14]
웹사이트
青天を衝け:大河ドラマ新キャスト発表 磯村勇斗が第14代将軍・徳川家茂 深川麻衣が和宮 西郷隆盛役は博多華丸
https://mantan-web.j[...]
2021-0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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